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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마음의글, 생명의글

by 피러팬0405 2009. 2. 2.



초등학교 6학년 때 수학여행을 갔습니다.
서울의 창경원이었어요.
"창경원으로 수학여행을?" 하고 의아해 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강원도 깡촌에서 서울에 간다는 것은 그 당시에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잔뜩 기대에 부풀어서 떠난 수학여행이었는데,
저는 심한 배탈이 나서 창경원 안에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버스 안에 혼자 누워 있었습니다.

근데 수학여행을 다녀온 후 학교에 난리가 났습니다.
어떤 여학생이 돈을 잃어버렸다는 겁니다.

조례시간에 담임선생님이 "너, 앞으로 나와!" 하시더니 다짜고짜 뺨을 후려갈기는 것입니다.
다른 학생들이 창경원 구경을 하고 있을 때에 저 혼자 버스 안에 누워 있었으니 범인으로 의심받은 것이지요.
"제가 안 그랬어요!"하고 항의해도 소용없었습니다.
"이 자식, 똑바로 안 불어?"하면서 더 많은 매가 날아왔습니다.
엄청 얻어맞고는 억울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 책가방 들고 교실을 나와 버렸습니다.

집에 돌아가서 엉엉 울고 있는데 아버지가 물었습니다.
자초지종을 얘기했더니 아버님이 아무 말씀도 안 하시더군요.

그날 저녁에 돈을 잃어 버렸다는 여학생의 아버지가 저희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제 딸년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겨서 정말 죄송합니다."하고 사과를 하시더군요.
얘기를 들어보니, 그 여학생이 돈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랍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집에 돈을 놔두고 온 것이지요.
그걸 모르고 선생님에게 돈을 잃어버렸다고 알린 것입니다.

수학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야 자신이 돈을 집에 놔두고 간 것을 알게 되었고,
등교하는 날에 선생님께 말씀드리려고 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등교한 날 아침에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너, 나와!"하고 저를 범인으로 지목하고는
싸대기를 날리고, 저는 울면서 안 그랬다고 소리 지르고…….
이렇게 분위기가 살벌하게 돌아가니까,
그 여학생이 무서워서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겁니다.
자기 때문에 큰 일이 벌어졌으니 아무 말을 못한 것이지요.

다음 날, 아버지가 제 손을 잡고 학교에 가서 담임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자초지종을 알리고는 이렇게 말씀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선생님이나 저나 같은 교직에 계시는데, 학생을 이렇게 다뤄야 되겠습니까? 좀 신중하게 생각하고 처신해 주세요."

요즘 시대 같으면 학부모가 당장 선생님 멱살 잡고 난리가 났겠죠.
하지만 저희 아버님도 교직에 계셨고, 성품이 워낙 온순하신 분이고, 또 당시에는 선생님을 많이 존중해드리는 그런 분위기였습니다.

근데 다음 날 학교에 가자마자 또 불려나가서 얻어맞았습니다.
선생님이 훈계하는데 가방 싸들고 집에 갔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사과는 커녕 맞고, 맞고, 또 맞았습니다.

이게 35년 전의 일입니다.

몇 년 전, 초등학교 동창회에 나갔는데
누군가 그 때 일을 기억하고 얘기를 꺼내더군요.
그는 아직도 저를 범인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근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럴 만도 하더군요.
선생님이 자초지종을 밝혀주지 않았으니…….

실상을 알고 있는 다른 친구들이
"그게 아니다. 이차저차해서 얘가 범인으로 몰린 거다."하니까
그가 깜짝 놀라면서 엄청 미안해 하더군요.
그의 기억 속에 저는 창경원 수학여행에서 여학생의 돈을 훔친 도둑놈으로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ㅎㅎ

*****************

작년에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그 선생님이 최근에 은퇴를 하셨는데, 가까운 친구들 몇 명이 선생님과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교직에 있는 친구가 주선을 했더군요.
제게 연락을 한 친구가 묻더군요.
"깽판치지 않을 거면 같이 갈래?"...ㅎㅎ

35년 만에 뵙는 선생님은 많이 늙어계셨습니다.
아주 예쁜 새댁으로 기억 속에 남아 있던 사모님도 그렇고....
선생님은 우리에게 시집을 한 권씩 선물하셨습니다.
그동안 시인으로 꾸준하게 활동해 오셨고,
사랑하는 딸을 잃고서 그 아픔이 절절하게 묻어나는 시를 쓰셨더군요.

돌아오는 길에 친구가 운전하는 승용차 뒷좌석에 앉아 있으니 일종의 슬픔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슬픔이지만,
표층의 감정이라기보다는 깊은 곳에 차분하게 자리잡고 따스함을 전해주는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어떤 일을 겪던 사람은 그렇게 늙어간다. 그것이 슬픈 일이건 기쁜 일이건, 사람은 그냥 그렇게 늙어 간다. 그렇게 순환하는 거다...."

기억은 대수로운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일이 시간 속에 묻혀버리지요.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사건의 내용보다는, 그 사건이 내게 어떤 교훈을 주느냐가 중요합니다.
사건 자체는 시간 속에 묻혀 버리지만, 그 사건이 주는 교훈은 시간을 넘어서 항상 내 삶과 함께 합니다.
내게 호의를 베푼 사람이건 해코지를 한 사람이건,
그는 특정한 상황 속에서 내게 어떤 교훈을 주기 위한 매개체로 존재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의 의지와 무관하게 존재계가 그에게 어떤 역할을 부여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면에서 모든 인간은 같은 무대에서 활동하는 동지입니다.

조금만 더 깊이 살펴보면 연민이 안 생길 수가 없습니다.

-유나방송, 마음의글, 생명의글, Yoj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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